Today, I start to write English essay. it is difficult to steadily write this also is going to give up all. However an adventure is funny, I already started to speak English now. This is my first experience. Regretted to myself, it’s very late to speak English. I’m difficult to learn English as new things because I already have completed language’s method, speaking and style. In conclude I must change to make my action English’s mechanism. One more repetition, adventure is funny. Do my best don’t go regretting myself.

   최고임금제라 함은 정의당에서 발표된 균형 잡힌 소득 재분배를 통해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와 같은 사회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하나의 방안이다. (참고기사1[1])

 문재인 정부 초기에 최저임금제의 급격한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하나의 방안처럼 사회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방안으로 보인다. , 하한선이 있으니 상한선도 정해 놓을 수 있다면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실질적인 방법으로도 느껴진다.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해 조금 찾아본다면 해외 사례에서도 실제로 적용하기위해 시도한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기사2[2]) 결과가 어찌하든 소득 불평등에 의한 사회적 문제 제기는 전세계 어디든 나타날 수 있는 문제사항인 것이다.

 내 실제 경험과 빗대어 얘기해보자면 현재도 진행중이지만 평범한 노동자 혹은 근로자로서 구직 경험과 다양한 회사들의 연봉계약들을 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이라는 군과 대기업이라는 군 사이에서 적게는 1000만원 정도에서 많으면 1500만원 정도 차이가 벌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가 결혼이나 주거 목적으로 집을 구하기 위해 실질적인 금융권 대출 부분에도 대기업이 월등히 많은 한도와 적은 금리로 더 나은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분명 최고임금제의 취지도 근로자간 임금에서의 형평성이나 사회 불평등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써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 대상자들이 고위 공직자 혹은 국회의원 또는 민간기업의 CEO와 같은 나름 사회에서 성공한 인물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잣대를 만들고 국가가 강제해서 사회적 통념으로서 지도자급인 그 사람들에게 ‘우리와 천문학적인 차이 수준의 급여가 아닌 겨우 몇 십배 정도의 차이내에서 임금을 받고 있어라는 자위적인 부분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사회적 정의나 평등으로서 느껴질 수 있는지 그 실효성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이라는 사회적 가치에 기반하기 위해 이와 같은 제도를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사회 공동체로서 평등한 인간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은 한계선을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 그 문제 정의부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해방 이 후 민주정치의 모습을 표방하게 되면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산업화의 세대 다음에 민주화의 세대를 겪었고 지금 현재에 와서는 기술적으로는 4차산업 시대의 화두와 인생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을 어느 누구나 가지고 사는 시민 주체적인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의 주체성이 국가라는 물음에서 일정 부분 국민 또는 시민으로서 사람이라는 주체로 질문의 대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이다. 일전에 대통령의 연설에도 포함되었듯이 정의 평등 공평과 같은 가치를 더 이상 이상주의로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론들이 제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보인다. 이런 시대적 사명감에 빗대어 위의 주장들을 생각해보면 최고임금제와 같은 한계를 정하는 표면적인 사회적 정의 방법에 대해서는 소득불평등의 실질적인 대안으로서 부족하다고 보이기 때문에 찬성할 수가 없다. 그런 상위층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의 기법은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에 대해 철저하게 준수시키는 것으로 그 높은 연봉에 대해 실질적인 노동적인 가치가 있었는지를 묻는 것으로 책임을 지우는 게 맞지 무조건적으로 상한선을 정해 사회적인 시선을 동일하게 맞추는 부분에 대해서는 불평등에 대한 실체를 해결하지 못하는 일종의 우회방법으로만 보인다.

 소득 불평등에 대한 실질적인 계층인 노동자나 서민계층을 조금 더 정의롭고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의 제도가 만들 수 있는 것 보다는 기업의 매출에 기인한 실질적인 소득 재분배가 말단 직원에까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를 한번 검토해보는 부분이 더 실질적인 부분에서 소득 평등을 가져오는 부분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주장이 사기업의 실제 순이익까지 나라가 간섭해서 소득 재분배에 칼을 들어야 하는게 맞는지에 대한 현실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분명 공동체로서 일을 하는 것과 같지만 사유재산으로도 취급이 되는 회사경영권에 대한 부분까지 나서는 것은 엄연히 국가의 월권 행위로 비추어질 수 있다. 다만 이런 식의 제안을 하는 이유는 강제성이 아닌 그 공동체 일원들에게 자발적인 책임을 위임하기 위함이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 있음은 헌법이 주관한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국가의 운영에 직접적인 책임과 업무를 다하지 않는다 다만 국민은 개개인이 아닌 그 구성원들이 모여서 국가라는 무생물 대상에게 책임을 요할 수는 있다. 이런 부분과 같이 현재의 화두인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도 국민집단이 원한다면 문제로 삼고 여러 시행착오들을 겪으면서 해결을 해서 더 좋은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을 당연한 과제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회사의 수익이나 매출에 대한 이익들을 직원들에게 강제로 배분하는 것이 아닌 권장사항 수준을 정해서 세무상에 의해 감사를 받는 회계법인이라면 당해 년도 이익대비 직원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소득 분배 기준을 회사 공동체내에서 사내 직원들에게 알권리로써 수치를 명시하고 쉽게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부분으로 입법하는 것이 더 정의 실현에 가까운 새로운 제안을 하고 싶다. 즉 국가와 국민의 관계처럼 운영이나 전반적인 정책사항에 대해서는 전권을 위임할 수 있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 국민들이 모여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중소기업과 같이 소득 분배가 명확하지 않는 회사들에 대해서 순이익이 어느 정도였고 해당 부분을 분배했을 때 어떤 금액이 돌아 갈 수 있는지 숫자와 비율로서 직원들에게 고지하고 추가적인 분배가 필요 없다면 기존 방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불합리한 구조가 있다면 내부 구성원들이 고액연봉의 경영진에게 항의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치적 근거나 협의가 가능한 제안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는 취지의 해법으로 보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최고임금제의 문제 정의가 소득 불평등과 사회적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당위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해당 방법에 대한 무위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단지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치와 연관된 사내 이익금 즉 재무 재표와 연관된 순이익을 직원들에게 알권리로 제공하고 만약 재분배를 실현할 경우 어느 정도가 가능할 수 있는지 이익의 몇%를 균등하게 나눌 때의 구성원 개개인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을 같이 공유하는 회계문서 작성에 필수 조항을 넣는 것으로 새로운 제안을 하고 싶다. 최저임금은 분명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완이 될 수 있지만 최고임금은 약자를 위한 위로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분명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페인과 같은 성공적인 사례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익에 기반한 정보 공개를 강제하는 것이 사회 정의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지 여부를 구성원들이 고민하게 하는 것으로 필요에 의한 행동으로서 공동체의 해법을 제안한다.

이와 같은 근거 사항으로 같은 대기업군인 삼성전자와 네이버 혹은 카카오들을 비교해보자면 계약 연봉은 3곳 모두 대기업군에 기반한 연봉제로서 비슷할 순 있지만 실제 인센티브까지 포함한 당해 년도 원천징수급여 금액에서 단순히 중소-대 기업간 급여 차이보다 수천만원이 더 차이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런 회사내 이익을 어떻게 공유하느냐 에 따라 소득 수준이 단순 급여 수준의 차이를 뛰어 넘게 된다 분명 대한민국의 수 많은 중소기업들이 겨우 버틸 정도의 매출들을 유지하는 생존이 달린 회사들도 있겠지만 적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을 유지하는 탄탄한 중소기업들과 일정 수준이상의 이익이 꾸준히 나는 회사들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회사 들에서 소득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지고 긍정적인 사례들이 많아진다면 분명 시작시에는 남들보다 적은 임금이었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버틴 노력으로 대기업이나 일부 지도층에 비교하는 것 없이도 세상사는 것에 문제없고 소득에 있어 평등보다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삶을 실현하는 방향성에 더 실효성을 가지는 정책으로 얘기하고 발전시키고 싶다.

정당의 공약이 보여지고 식 제안보다 실질적인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물음을 가지고 최고임금이 아닌 보편적 임금이 노력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서 정책의 방향을 삼았으면 한다. 이런 부분에서 정의당의 정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반대하는 이유와 더 좋은 방법을 제안하는 것으로 나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1] 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66236

최고임금제, 이치는 맞는데 왜 지지부진할까 김철웅 경향신문 논객

[2] http://workingvoice.net/xe/index.php?document_srl=287428

[최고임금] 최고임금제 정말 황당한 이야기일까? –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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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직업적 사명감이란..

 집에 TV가 없어 따로 드라마를 보지는 않지만 다시보기로 흔히 Well made라고 하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초반부에서는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날 정도로 취업과 청년들의 아픔으로 시작했었고 흔히 철밥통이라고하는 공무원에 대해 다루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이라는 현장 속의 공무원에 대해 이야기 함으로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또한 느껴지는 드라마였다. 공식홈페이지의 마지막 메이킹 필름 클립영상에서 작가의 말처럼 대본이 존중받았다는 것 처럼 사명감있는 경찰들의 많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직업적 사명감이란 아니 그 이전에 내 직업에 대해 사명감을 가진다는 사람을 사실적으로 현실에서 본적은 없다 나 또한 개발자로서 사명감따위는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다만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성인이 되어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함으로서 부딛치게 되는 그 많은 어려움과 난관들이 과연 어떤 의미로서 헤처나가게 되는지 다시한번 생각할 수는 있었다. 경찰 혹은 소방관 그리고 존경받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나름 표면적으로나마 사명감이 필요해 보이는 직업들이 있다 그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아무리 얘기한들 대다수의 보통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이 일을 하는것에 있어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그 인생의 행복의 요소로 보인다. 극 중에서 많은 경찰들이 나오지만 과연 현실과 잘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정도로 인생 나름의 고충을 가졌지만 본인이 경찰이라는 것을 알고 동료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많은 표본들이 등장한다 젊은 경찰부터 늙은 경찰 또는 부모와 자식 그리고 은퇴한 많은 이들까지 그 인생 나름의 어려움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극 후반부에 주인공 염상수의 어머니가 했던 말 처럼 건물 청소하는 청소부가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일은 아니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처럼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그 나름의 사명감을 필요로 한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 부모의 사명감 혹은 가장의 사명감으로 일을 할 수 는 있겠지만 그런식으로 일을 한다면 과연 더 좋은 결과들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직업적 사명감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극 중의 이야기를 하면 길어질 것 같아 최대한 내 생각을 적음으로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누구나 현장 경찰같은 사명감으로 일을 하고 결과와 과정을 논하게 되면 나는 말야 혹은 나때는 말야 식의 이야기밖에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작고 크고 대단하고 하찮고를 떠나서 그 일에 대해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앞에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좋은 경찰 혹은 좋은 선배 또는 좋은 사수라는 타이틀을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그 좋은이라는 표현에 대해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좋은 이라는 말을 떠나서 경찰 혹은 개발자 또는 부모에 대해서 그 위치와 직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본질적 의미를 알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좋은 경찰과 나쁜 경찰이 따로 있다는 것은 편가르기에 분분해 보이고 애초에 경찰이라는 직업 자체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대해 선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사람이 단어 본질을 변질시키게 만드는 것이지 그 단어에서 나쁜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묵묵히 자기일을 본분에 맞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치와 평가를 일부 편협한 시야로서 판가름하지 않는 것을 이번에도 배우게 되었다 

 사실 사명감이라는 것이 직업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다만 사명감 혹은 옳은 신념에 대해 가진 사람이 많다면 어쩌면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있구나 라는 확신은 생기게 되었다 과거에 법대생 친구와 언쟁을 높이며 세상이 변한다와 변하지 않음을 논한적이 있다. 어짜피 피라미드 구조라는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에서 처럼 과거 역사를 보면 진정 세상은 변함이 거의 없어 보인다 민주주의 세상이 되어 더 많은 약자들이 최소한의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의 이면에 과거에는 핏줄로 왕족과 귀족과 하층민이 나뉜 것이 현대의 자본에 의한 수저론을 논하게 된 것을 보더라고 고대 국가에서 현재까지 세상이 그리 크게 달라졌다고 보이지는 않았고 그 부분에서 그 친구에게 강하게 어필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어떤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세상은 달라지고 더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했었고 난 그 부분을 납득하지 못했었다. 결국 말싸움으로 서로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지만 최근의 민중(촛불?)시위부터 과거 민주화 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많은 젊은 청년들의 희생을 보더라고 분명히 그런 희생들로 촉발된 변화들로 부터 깨닫게된 부분이 있다. 그건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사명감과 옳은 신념들이 모이면 세상이 변할 수도 있겠다는 하나의 큰 철학과 힘이 느껴졌다 적어도 꼭 경찰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옳은 신념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한다면 분명 그 세상은 변화의 불씨에서 변화의 횃불로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겠다는 내 나름의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는 이는 꼭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작아보이는 소소한 시민들이 모여도 분명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모습을 이 드라마에서 보게 된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극의 핵심을 담당하는 오양춘이 한정오라는 현실인물에게 해주는 말에서 비슷하지만 더 와닫는 말을 해준다 젊은 패기의 신입경찰이 가질 수 있는 옳은 신념이 그게 지금 다른 이해관계에서 충돌하더라도 그런 부딪치는 뾰족함이 있어서 너가 좋다는 말에서 현실의 부조리함이 쉽게 납득되지않아 아직은 닳고 닳지 않아 부딪침이 있는 모남이 필요하고 좋다는 말이 결국 개선할 것이 있다면 한번 더 고민하고 생각하고 다시한번 더 바꾸어 볼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음으로 들린다. 결국 그 모남도 나중에는 둥글둥글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모남을 제시해야만 뭔가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해보고 싶은 어른으로서 나보다 경험이 적고 부족한 사람일 지라도 인정하고 존중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개발자의 사명감이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과거에 이직을 하게 된 부분에서 어떻게 하면 더 품질이 좋은 SW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십수년을 거친 거의 불량품에 가까운 SW들을 어떻게 더 좋게 바꿀 수 있을 능력이나 힘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 고민을 하는 잘난 사람들이 있어 SW공학이라는 것이 학문으로 생겨졌고 컴퓨터 언어로 동작하는 코딩이 아닌 전체적인 그림으로서 SW를 그리는 것에 대해 어려운 말들로 설명된 것들은 본적이 있다. 그 부분들이 아직 나에게 어려웠기 때문에 궁금증과 답답함으로 여러번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나의 무능력함으로 조직을 개선하거나 조직원의 생각들을 설득하지는 못했기에 그저 그것을 가르켜줄 사람만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생각이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내 못난 실력과 무지함의 한계에 나도 지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또한 내 현실의 벽에 막혀 이 직업에 대한 회의감도 많이 들었다. 개발자의 사명감이란 더 품질 좋은 SW를 만들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이 직업을 가진것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아지게 될까? 내 주위에는 과연 어떤 사람이 사명감을 가진 개발자일까? 하는 의문이 많이 남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꼭 구글 페이스북 같은 회사의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작은 회사의 작은 SW일지라도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더 좋은 것이 뭔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가 이 개발자라는 일을 하는 것이 더 보람있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품질이라는 부분도 결국 수치화 할 수 있거나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개발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짜여진 코드일지 고민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이런 고민을 하는 동료들이 내 주위에 많다면 앞으로 더 좋은 품질과 더 다양하고 재밌는 SW개발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사소한 네이밍 부터 단순하게 잘 읽혀지는 코드도 기능의 중요도에 따라 하찮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발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고민해 볼 요소라는 것에 대해서 발전하는 내가 더 좋은 품질의 SW를 고민하고 개선점을 누군가에게 제안할 수 있다면 이 직업을 잘 선택했다는 만족감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사명감이란 그 행동과 결정에 대한 옳은 신념부터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직업적 사명감이란 그 직업을 선택함으로서 어떤일을 하는지 알고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왜 이 일이 하찮아 보여도(흔히 코딩하는 개발자를 3D 직업군으로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편협한 사람에게라도 이 일이 왜 필요한 일인지 설명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옳은 신념을 가진 개발자로 보인다. 난 적어도 개발자의 사명감 이전에 더 좋은 품질을 고민하는 신념을 가진 개발자로서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보자 

시작을 어떻게 할까? 따로 제목을 만들지는 않기로.. 

일하는 시간이 재밌다는 것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 현재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재밌게 일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고 그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같이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우리라는 말이 뭔지 알지 못해서 그저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인 것 마냥 내 눈 앞의 것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앞을 보고 달려왔다 앞만 보고 달린 것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못내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작게 보진 않았다 우리라는 말이 아닌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를 위해 사는 것만 생각한다는게 정작 주위를 보거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놓쳤다고 인정하기에는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요즘들어서 많이 틀렸다는 생각도 든다 

특별하지 않아서 일까? 평범하게 우리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 그저 내가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왜 그리 힘들게 짊어질 생각만 했는지 미련함에 대한 아쉬움이 내 인생의 세월을 같이 한다 

작가라는 부분을 생각했을 때 단순히 중학생때 적어 낸 장래희망 말고도 아련함에 대한 영상과 음악의 표현으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의 납득이 되는 그 속의 주인공 처럼 마치 내가 부르는 노래의 주인공 처럼 내 노래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각과 청각의 이해가 처음의 계기 였다. 시월애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 그 극의 내용보다는 아름다운 영상과 공감이 되는 음향에 대한 해설이 어루러짐에 대한 완벽한 이야기를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그 속의 대사와 이야기가 새롭게 들리는 부분이 있다. 몰입이라는 것이 내 주관적 감상이었는데 대사라는 것을 보니 상대방에게 혹은 불특정 다수의 우리에게 하는 말이 공감이 되고 납득이 되는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부분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It's good because I feel like I have someone on my side(내 편) at work 

내 편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좋아서 오래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공감능력이지 않을까? 내 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나랑 무언가 같이 하는 사람이 내 편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을까? 

내 편이라는 부분이 가족의 의무가 아닌 존재라고 생각한 적은 있다. 다만 그 부분에서 인지하지 못해 남의 편인 것처럼 대화한 부분이 못내 아쉽고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 가족은 같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편이라는 부분에서 공감하고 즐거워 하고 행복해 하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타인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이 뭔가 지고 있다고 느껴서일까? 무언가를 공감한다는 것이 그냥 한번 져본다는 것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굳이 남녀관계가 아니라도 타인과 공감할 줄 아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내 인생을 사는 것이 혼자사는 것이나 혼자하는 것이 아닌 여럿이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많이 들어주고 많이 생각해주고 진실된 사람이라서 그래서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는 부분을 보여주고 싶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유치한 드라마에서 emotion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공감 즉, 수많은 감정과 가치관이 부딪칠 때 단순히 논리적으로 우세하기 위한 이성적 판단만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다른 하나의 해법으로 다가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해보고 싶다. 이기려고 안 듣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 한번 더 들어준다는 부분이 그 동안 내가 못했고 안 해본 부분이라면 이제는 할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When I was younger, I got lost(헤매다) because I didn't know. But now, I get lost pretending like I don't know. 

이 대사는 사실 나이먹음을 인지하는 부분이지만 굳이 로맨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깨달음으로도 느껴진다 평생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모른척하고 사는 것이 적어도 젊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로맨스지만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모른 척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러 대사들 속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 저 위의 두 마디가 마지막이라고 가장 와닫는 부분이 되었다. 대사가 맛있다는 부분이 공감이 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맛집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자. 하나 확실한건 나도 택배받는 것보다 내 일을 하는 것이 재밌고 식사하기 위해 방문한 맛집에서 메뉴판 보는 것이 흥분되고 재밌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보다 더 이 일이 좋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좋아하는 내가 되는 것에 대해 힘들어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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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TV를 따로 구매하지는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도 적었고 BTV App을 통해 아이패드로 IPTV 채널들을 볼 수 있어서 따로 TV가 필요하지가 않다. 여기서 가끔 무료 제공 영화를 보는데 한 일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제는 나이를 먹다 보니 신파성의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나 지나친 듯한 공손함은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너무 뻔한 드라마적 서사 구성이 비현실적인 억지 감동을 가져오는 부분이 많았다. 역시나 이 영화도 그런 부분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착하기만 한 주인공과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연을 가진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는 성인을 위한 동화물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영화 소개만 봐도 내용이 상상이 되고 또 결말마저 비현실 같은 쓸데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보는 이유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진 다는 것 그리고 뭔가를 비워볼 수 있다면 다시 새롭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물음을 한번 해보게 된다. 

 주인공은 아침마다 체조를 하고 회사에 충성을 강요하는 이상한 블랙기업의 젊은 영업사원이다. 그 스스로도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체 상사에 치이고 업무에 치이고 하면서 쳇바퀴 돌 듯이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아마도 실제로 이런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젊은 세대의 청년들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잘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기 위해 잘해야 함을 강요받는 것이 내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때론 어깨에 무거움을 지운채 나도 모르게 그 무게에 치였음을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조차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았을까? 

 굳이 그런 부분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내려놓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나가는 부분은 분명 필요해 보인다. 다만 이 영화처럼 지치고 무거운 어깨 속에서는 더 이상 진행하기가 힘들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희대의 사기라는 부분은 분명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청년이기에 주어진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늙고 나이를 많이 먹으면 무언가 하는 것보다 쉬는 것을 강요받는다. 생각해보면 은퇴라는 것이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내 자신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굳은 심지와 확고한 선택이 있어야만 주위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젊었을 때 겪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아픔이라 함은 젊은 시절의 실패를 견디라는 격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그 방향에 있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길을 되짚어 보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 같다. 주인공은 분명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친구를 통해 치유를 받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내 인생을 오롯이 내가 설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도 어깨가 무겁다. 개발자라는 쓸데없는 꿈과 사명감으로 무장해서 도전했지만 분명히 실패한 부분이 있고 때론 무모했고 한편으로는 부족했다. 성공에 목을 매달지 말고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새로운 것에 대해 겁먹지 않는 용기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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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긴 어게인 3을 보다 박정현과 헨리가 부르는 shallow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이 영화를 언제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보게 되었다. 음악영화가 주는 감동이라면 가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와 영상의 조화가 이루어져 더 깊은 각인을 새겨준다. 시간이 지나면 노래는 점점 잊히지만 영상과 가사가 어우러지는 순간은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된다. 시월애라는 옛 영화가 스토리보다 음악이 기억이 남는다. 조만간 러덜리스라는 음악영화도 꼭 보고 싶은 영화이다. 

 영화 자체의 내용은 두 가수의 사랑이야기다. 이전에 비긴 어게인 영화에서는 과거 사랑으로 회귀하는 내용이었다면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일어날 법한 두 스타의 사랑이야기이다. 무언가 헌신적인 부분이 있는 것이 메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얘기처럼 사고뭉치? 이기적인 자기애? 와 같이 한쪽의 배려와 이해와 사랑이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말 또한 비슷한 느낌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우연한 끌림으로 시작된다. 늘 술과 약에 취해 사는 성공한 락스타가 술을 채우기 위해 우연히 방문한 드랙바(여장남자들이 공연하는 바)에서 유일한 여자 싱어로 공연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같이 술을 마시면서 누구나 알아보는 연예인이라서 주위 사람들이 귀찮게 하는 것을 터프하게? 넘기게 되고 즉석에서의 자작곡을 통해 서로 속마음도 조금 터 놓게 된다. 음악을 통한 끌림이라는 부분이 시너지가 되어 남주인공의 적극적인 구애에 무명 일반인인 앨리는 자작곡을 그의 공연장에서 세상에 보이게 된다.

 여주인공 앨리는 꿈만 가진 가수지망생에서 우연한 기회를 통해 노래하는 가수가 되는 모습이 재능을 가진 재야의 천재가 평생에 한번 올 기회를 붙잡아 세상에 나오는 이야기는 성장드라마의 내용과 비슷했다. 꿈을 이룬 앨리나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던 잭의 모습을 보면서 타고나거나 될 놈이거나의 스토리는 항상 나오는 이야기지만 부러운 소재이다. 

 꾸준히 작곡노트를 습작하면서 꿈을 키우는 앨리나 유년시절의 불우함으로 인해 음악에 미치게 된 잭이나 영화에서는 타고난 것으로 쉽게 보이지만 영화적 순수함을 더해 보면 그 둘은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통해 치유를 받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재능의 차이를 떠나 순수하게 음악 하나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이러저러해서 항상 핑계를 대기 바쁜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몰입감이 그들의 천재성에 당연성과 개연성을 만들어 주어서 그나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더 콜이라는 가수들의 콜라보를 보여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딘딘이라는 래퍼가 노을과 이문세의 휘파람을 재해석하는 데 있어 색다른 음악성을 보여준 모습은 마냥 철없어 보이는 TV 속 캐릭터에서 내 직업, 내 음악에 대해서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새삼 놀랐다. 음악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열정과 진심 그런 진짜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음악에 대한 진심과 열정에 대한 몰입감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더하고 주인공의 뛰어난 가창력과 음악에 대한 사랑이 둘의 로맨스의 정당성도 설명이 된다. 음악을 통해 사랑에 빠지고 음악을 통해 공감을 하니 영화 속에서도 둘의 듀엣 장면들에서 그들의 진심과 열정이 녹아든 듯한 좋은 음악들을 만들어 낸다.        

 그 둘의 하모니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는다. 잭의 음악적 영감이 알콜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13년 동안 어쩔 수 없이 살아남았었고 그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켰을 때 미치지 않고는 힘들었는지 술과 마약에 의존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이명 증상을 달고서도 무대에 오른다. 그의 천재성에 대한 다른 한 면의 결핍이나 음악적 몰입감을 설명해 주지만 주위 사람들이 뒤처리를 하다가 지친다는 말처럼 가장 오랫동안 뒤처리를 해온 이복형과도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앨리와도 갈등을 겪는다. 앨리는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인물이었기에 꿈에 대한 결핍이 그녀의 자양분이라면 삶의 고통에서 음악을 만드는 잭의 재능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영화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순수성으로 포장해주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앨리의 엄마 같은 모습은 성공한 락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음악과 사랑만 갈구한 잭슨이라는 인물의 추락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가 리메이크 작이라고 해서 원작인  A star is born the original에 대해서도 찾아보니 가장 오래된 것은 배우의 시점이었고 두 번째 리메이크 작은 현재 내용과 비슷하다고 되어있다 다만 추락하는 잭의 모습에서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모습이나 인기마저 다 떨어진 듯한 시놉시스는 주위 사람들의 '뒤처리'라는 것에서 지금의 리메이크 작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심하게 알코올 중독에 마약중독에 향략에 빠진 듯한 뒷배경이 상상된다.

 꿈을 이루게 도와준 잭의 추락을 옆에서 보는 앨리는 자신의 앞 길에 방해되는 잭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잭은 마냥 영화속 상상의 인물 같지는 않은 것이 알코올 중독 부모 밑에서 자식도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평생의 음악을 만들었듯이 그런 결핍이 음악에 대한 미친 몰입감과 상대방의 음악을 이해하고 처음 본 앨리에게 아무런 조건과 현실의 필터 없이 온전하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앨리 또한 잭이라는 남자가 다른 남자와는 다르게 순수한 면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천하의 락스타이지만 사랑을 구걸하고 애원하는 모습이 술과 음악과 앨리만 있어도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듯한 주인공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앨리를 사랑하기에 이제는 바꿔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내려는 것이 본인 스스로의 내면까지는 바꾸지 못하는지 결국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본인이 앨리옆에 있어서 이제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메릴린 먼로도 본인이 조에게 피해만 끼칠것을 생각하고 자살로 마감한 것으로 되었을까? 어쨌든 타인에 대한 사랑 이런 남녀 간의 사랑으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관념이나 트라우마가 타인으로서는 치유되지 못하는 한계성을 보여주었다. 영화의 결말은 극단적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날 덜 외롭게 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다는 부분이 사뭇 공감이 간다 인생의 조력자이지 그 사람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고 선택은 결국 내가 하는 것이 때문에 덜 외롭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남녀 간의 사랑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가장 잘 연출한 부분이라면 마지막에 있다. 앨리가 잭이 작사한 노래로 잭을 추모하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도중에 과거시점으로 잭이 피아노에서 노래하는 이동이 매우 기억에 남는다. 음악 영화로서 둘이 한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마지막에 앨리와 과거의 잭이 부른 노래와 가사는 이 영화를 베스트로 꼽는 사람들이라면 기억에 각인되도록 가장 마지막에 그려져서 기억 속에서 오래 남을 것 같다. 줄거리를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항상 음악영화는 각인이 남는다 잭의 순수한 노래에 앨리가 눈물을 흘리며 안아주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베스트 씬이었다.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정치인으로 알고 있다 그는 노무현의 친구 혹은 정치적 동반자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유시민은 정치인 보다는 지식인(어용지식인이면 정치적이라고 봐야 하나??) 혹은 작가 유시민으로 기억한다.

 

작가라고 생각하면 문학적 글쓰기를 쓰는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이 책은 비문학 책이다. 그는 문학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 작가 이다(단편소설이 하나 있다고는 한다). 비문학적 글을 쓰면서 자신만의 생각과 논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사회의 흐름에 질문(혹은 반항)을 하고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진보지식인 유시민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썰전의 유시민이나 노무현의 그늘 속 유시민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대의를 생각하고 할 말은 하는 선구자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논거를 제시하거나 명분을 찾을 때 자기 자신의 비판에 대한 반박이나 다른 지식인의 글을 조목조목 짚고 넘어가는 것을 보고 아... 이 사람 상당히 피곤한 면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기 위해 본인의 주장과 그에 대한 증거를 고민할 줄 알고 그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이지만 진보지식인 입장에서 혁신과 개선에 대한 미래 지향점이 높은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지지않는 논증법은 과거 과격했던 정치적인 모습의 일부분을 보는 느낌이었다. 3자의 입장에서는 지지않는 다는 것은 이기기 위한 논증법으로도 보이기 쉽다 (글 곳곳에 다른 사람의 글(특히 보수성향 지식인???)을 까는 내용들을이 조금 있다 링위의 파이터와 유사한 같은 느낌이 있다)

 예전에 7년 전 쯤 전에 법대생 친구랑 독서실 총무를 할때 어떤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각자 세상이 좋게 변하고 있다(=친구)와 과거 고대시대때부터 계급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나)라는 주제로 말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말싸움 중에 갑자기 욱해서 욕과 닥치라는 말로 논증을 회피하고 패배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강압적이지도 않았고 나름 증거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갑자기 유토피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바뀐다는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의 주장을 이해하면서 반박할 수 있는 주장을 하지 못했다 결국 내 입장으로 설득을 하지 못했고 어쩌면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상위 0.1%안에 들면서 법을 논할 줄 아는 친구와 지지않는 논증대결 자체가 무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의 말처럼 세상이 좋게 변한다면 다행이다.. 다만 그 혜택을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다시 또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두번째 이유는 글을 쓰려면 당연히 그 글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영어를 문법만 접하다 보니 시제니 품사니 형식과 같은 내용을 알겠으나 글을 제대로 쓰거나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보기 중에 빈칸에 어울리는 단어를 넣는 정도이다. 이 책에서는 문법을 기초로 국어의 특성을 알고 써야 한다는 느낌이 있다 복문에 들어있는 복잡한 주술 표현을 간단한 단문으로 바꾸는 부분이나 죽었다 앞에 붙는 단어가 어떤 단어인지에 따라 문장에 감정이 생기고 어울리는 문맥을 만드는 부분은 모국어인 우리글도 막 쓰는 것이 아닌 알고 써야 잘 쓴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컴퓨터 언어도 막 쓰는 것(ex:Ctr+C/V) 이 아니라 원리를 알고 써야 좋은 코드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 영어를 쓸때 특정 동사와 어울리는 목적어를 결합하거나 그 어구나 단어 앞에 어울리는 전치사를 넣는 것이 매우 어렵다 실생활에 잘 쓰지 않아서 인가(근데 막상 영어로 된 것을 대충 보면서 살고 있다....) 싶지만 영어에서도 어울리는 문맥을 만드려면 어울리는 동사와 목적어와 전치사와 같은 단어들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은 배울 수 있었다. 

 예시를 취약한 외국어로 생각했지만 우리 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문장을 길게 쓰기 위해 뒤죽박죽 주어랑 서술어를 여러번 복합적으로 쓰는 것이아니라 단문을 사용해 뜻을 분명히 전하고 문맥에 어울리는 단어를 사용해서 독해하는데 문제가 없는 글을 쓰라는 말이다. 단, 우리말의 은,는,이,가 와 같은 조사(일본형 조사도 있다고 한다)나 초등학교때인지 중학교 때 국어인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말어미까지 신경쓰면서 글을 쓰자니....  그냥 눈물이 난다.. 

 그래서 유시민이라는 작가가 하는 말이 옳으나 매우 깐깐하거나 피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책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특효법이 있다 단어뒤에 붙는 조사나 어미 같은것은 고쳐쓰기 할때 제일 많이 변경되었던 것 같다 글을 속으로 소리내어 읽다보면 운율이 생겨서 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어색한 조사나 어미 같은 부분이 제일 많이 수정된다 고쳐쓰기를 하면서 자연스러운 글을 만들다 보면 100%는 어렵겠지만 나름 읽혀지는 조사나 어미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 비추어 볼때 "5장 못난글을 피하는 법" 이 부분이 핵심 내용으로 보인다.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자신의 생각과 논리와 증거를 잘 연결 할 수 있는 지식인이며 그의 말은 강압적이지 않으나 뼈와 강단이 있고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단단한 말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많은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이며 글을 통해 벌었던 인세를 통해 독일유학을 갔었다고 한다. 그의 단단한 메시지는 대중적으로 파급력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제목 그대로 글쓰기에 대한 논리를 풀어 보면 6가지로 압축된다

 - 많이 읽기                                                         =>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서내공 쌓기

 - 많이 쓰기                                                         => 생각을 글로 표현 할 줄 알기

 - 핵심 내용 발췌/요약하기                                      => 글의 문맥이나 의도에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해  => 핵심내용을 전달 할 줄 알기  

 - 어렵게 쓰지 않기(한자어나 외래어나 어려운 말 남용X) => 쉽게 쓰기                   => 읽는 사람을 고려하는 글 쓰기 

 - 어설픈 복문을 단문으로 고쳐쓸 줄 알기                   => 짧은 글 쓸줄 알기 

 - 여러번 고쳐쓰기                                                 => 어색한 부분을 찾기       => 읽고나서 휘발되는 글이 아닌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글로 만들기 

 

 많이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4장 전략적 독서를 보면 학자나 지식인이 되기 위한 고전서들이 많이 추천되어 있다 몇몇 관심있는 주제나 들어본 작가들은 있었지만... 아마 매우 어려운 철학적 접근 책들이 많다. 그래도 토지나 자유론 같은 책은 괜찮다고 한다. 아니면 마지막 장에 있는 다이제스트책으로 추천한 8권의 책을 읽어 보는 것은 괜찮을 것 같다

 많이 쓰기는 가능하면 기억에 남는 일은 블로그나 에버노트 같은 곳에 기록하면 좋지 않을가? 싶다 

 핵심 내용 발췌하기나 요약하기는 실전같은 내용이다 독해력도 필요하고 또 이해한 내용을 가지고 잘 전달이 가능해야 그 글을 파악했다고 인정받는다. 결국 많이 읽고 쓰는 것 뿐만 아니라 본인의 생각이나 주장도 있어야 어 이 부분이 핵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런 부분에서 난 이 책의 핵심 내용은 5장 못난글을 피하는 법으로 보인다 이 쪽을 보면 글을 잘 쓰기보다는 이 정도 라도 하면 허접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가 보인다. 

 어렵게 쓰지 않기는 핵심내용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다 쉽게 쓰는 것은 고쳐쓰기로 어느정도 해결 될 수 있으나 나에게 특히 어려운 부분은 읽는 사람을 고려하는 글 쓰기이다. 프로그래밍에서도 어려운 부분이 사용자를 고려하는 기능 개발이 항상 어렵다. 구현에 치중하다 보면 항상 구현 후에 어 사용자 친화적인가?? 라는 의문이 이제야 생겼다 그냥 막 만든 것은 아닐 것임에도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다는 것은 쉬운길을 못보는 것 같다 최근의 지적에 의해 간단하지 않다 복잡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복잡한 것과 간단한 것의 차이를 잘 몰랐었기에 프로그래밍이 더 어렵다 

 글은 쓰고나서 다시 읽어 보면 운율에 맞거나 이 글이 읽혀지는가? 로 보면 나조차도 어색한 부분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수정하면서 읽는 사람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프로그래밍은 고민을 더 해봐야겠다(사실 답은 있는 것 같다..다만 나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어설픈 복문을 단문으로 고쳐쓰기가 가장 유용할 수 있는 부분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겪었다 바로 자기소개서이다. 취업컨설팅하는 사람들이 항상 기름기를 빼고 담백하게 글을 쓰라고 한다. 뭔 어려운말일가도 싶지만 불필요한 수식어구는 빼고 핵심 문장간의 관계를 잘 연결해서 자연스러운 문맥으로 만들어서 나의 장점과 강단을 글을 통해 표현하라고 한다. 

 글에 힘이 있다.. 이런 것은 아마 단문을 통해 나타나고 중간중간 복문을 통해 핵심내용을 꾸며주는 것이다.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 같은 내용은 적어도 1년에 한번씩은 업데이트 하다보면 나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노래에 빗대어 처음의 감정선은 단문으로 시작하지만 고음과 같은 부분에서는 복문으로 올라간다라고 표현을 했다. 

 고쳐쓰기는 위의 6가지 중에 가장 쉬울 수 있다 쓰기와 읽기와 말하기만 하면 된다 본인이 쓴 글을 읽었을 때 안 읽히면 읽히도록 고쳐 볼 수 있다 아니면 다른사람에게 읽어서 어색한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글이 다른사람의 뇌에 남는 순간이 오면 아마 특별하게 국어 문법을 알지 못해도 요약이나 뼈를 깍는 연습이 없어도 다시쓰는 시행착오만으로도 어느 정도 좋은 글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선천적으로 타고났으면 고쳐쓰는 것만 하다가도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화성악을 배우지 않음에도 작곡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론을 몰라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부분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그렇기에 고쳐쓰기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필수 인 것이다. 지금 이 글도 마무리를 짓는 입장에서 고쳐야 할 표현이 바로 생각된다. ~인것 같다. ~이지 않을가?? 이런 식의 되물음이나 불확실적인 부분은 좀 보기 않좋은 글이다. 내 스스로 자신이 없기도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고 느껴 진 것...이 아니라 느낀다.. 다만 이 글은 공식적으로 쓰일 것은 아니기에 뭐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는다.

오랜만에 멜로 다운 영화를 봤다 

 

그 동안 기억에 남는 멜로는 시월애, 클래식, 노트북, 파이란, 말할 수 없는 비밀(내용보다는 여주인공 때문), 오버 더 레인보우, 8월의 크리스마스, 동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등등 몇몇 개가 있었지만 대부분 20대 중반 이전의 기억이라서 오랜만에 비슷한 감성을 느꼈다.

 

 뭐 대부분의 이런 류의 영화가 그렇다 사랑 얘기들을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 극히 어렸을 때는 사랑이 뭐지? 이런 원론적인 의문이 생겼었다가 20대 중반에 내린 결론은 이런거였다.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만은 건들 수 없는 절대적인 그런 의미?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그 말을 하고 누구나 마음속에 품은 이상적인 그런 절대적인 단어로만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실존하는가? 하는 의미에서 설명할 수 없고 언처터블같이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인문학 강의를 보게되었을 때 철학자 강신주라는 사람이 이런 정의를 내려주었고 그때 조금 이해가 되었었다. 그 사람이 내린 정의는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출하는 것" 이라는 말을 했었고 그것을 아직 기억한다 이 말을 간단히 말하면 그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배고픈데 사랑하는 사람이 배고픈것 때문에 음식을 양보하고 내가 힘든데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참고 견뎌내고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자기 자신이 아픈 것처럼 느끼는 그런 류의 정의 였다 희생? 이런 의미와 비슷하게도 느껴질 만큼 말도 안되고 거지같은 느낌이 좀 있다.. 

 하지만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명확히 설명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부터는 나 때문에 부모님이 힘들어지는 것은 매우 피하게 되었다 나 보다 더 숭고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비정상적으로 보여서 인지 남녀간의 사랑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세상의 많은 노래와 영화 문학에서 그 말들을 반복하지만 현실에서 보이는 건 껍데기같은 느낌이 강했고 적자생존이라는 말 처럼 다른 사람보다 더 강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로만 그 말들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그 조건에 맞추기 위해 많은 감정노동들이 있었다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진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본 드라마에서 아... 이거인건가? 하는 대사를 보게되었다 못난이 주의보라는 비현실적인 드라마였는데 강신주가 한 말도 내가 느꼈던 감정들도 많이 맞아 들어간 대사가 있었다. 재혼으로 생긴 아들에게 양어머니가 해준 말이다

"사랑이란 건말야 아들...  세상사람들 아무도 못 보는걸 봐주는 거야... 그래서 그걸 알아봐 주는 거 때문에 사는 게 덜 외롭다고 느끼게 해주는 거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때문에 덜 외롭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도와 줄 수도 있는 수평적인 의미로 느껴졌다 사람의 명예와 돈 외모 같은 객관적인 수치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가 싶다

 

 어쨌든 서두는 그만하고 다시 영화로 오자 이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매일 매일 얼굴이 변하는 사람.

 실체는 있지만 겉모습은 매일 변하는 사람이 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여자들의 공감을 사기 좋게 잘 생긴 배우들로 채워지긴 했지만 은연중에 나도 내면과 외면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솔직히 이런 영화나 드라마는 각각의 주인공마다 케릭터라는 고유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한결같은 모습들이 비현실적으로 채워지지만 이 영화에서는 분리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여운이 남은 것 같다 세상 그 누구도 하나의 모습만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착한 모습도 있고 악한 모습도 있고 계산적인 모습도 있고 약한 모습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산다 특히 아무런 철학이나 주관이 없다면 현실적인 욕망에서 더 자유롭기 어려운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런 경우 돈이나 명예에 대해 많이 목말라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인 것 처럼 나 또한 그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실체를 알아 볼 수 있을까

 눈치라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모습에 따라 대처를 잘 할 때 쓰인다 그래서 눈치가 밝은 사람일수록 영리하거나 임기응변이 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이 비현실처럼 매일 변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고 묘사된다. 극 초반에 남자가 하는 일을 맞추는 부분이나 고객응대를 할 때 이 사람이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같이 고민해주는 모습이나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을 스스럼없이 좋아하는 모습들은 눈치있는 행동을 한다기 보다는 나무를 좋아하는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었고 또 상대방의 개성도 이해하는 듯한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주었다 중간중간 현실적인 갈등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에 중독된 것 처럼 대체할 수 없는 매력들에 서로 끌리는 듯한 모습은 부러움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이 영화가 완벽하다거나 완전히 몰입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갈등들이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위 남녀간의 사랑의 정의를 봤을 때 그 사람을 알아봐준다.. 라는 의미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아.. 저 영화 사랑 영화다 라는 답을 붙일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개성을 알아봐주었고 여자는 남자의 내면을 알아봐주었다. 그래서 잠깐의 이별이 더 외롭다고 느꼈기 때문에 다시 만나는 결론을 만든 것 처럼 그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알아봐주었고 덜 외롭기 위해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극은 끝이 난다

 

 이 영화를 보고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면의 아름다움?? 이건 아닌것 같은데 위의 내용들과 연결지어 보자면 내면을 알아봐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알아봐주는 것 이런 의미지 않을가 싶다. 원작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니 외국 영화는 아니고 광고 같은 거 였고 소개팅 같은 것을 생각했을 때 그때의 나는 단지 하나의 나의 모습일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다 보면 나를 알아봐줄까? 라는 의문과 앞으로 내 일과 개성 마음가짐 등 나의 좋은 모습들을 더 많이 만들도록 해봐야겠다

 

점선면을 구현하고 싶다 

무수히 많은 점을 이어 선을 만들고 그 선들로 면이 만들어지는 

그런 점선면을 만들고 싶다 


점 : Socket 

선 : Network 

면 : Connection 


하나의 Socket은 Client 역할과 Server 역할을 같이 한다 

스마트 기기가 하나의 점이라면 그 스마트 기기안에 있는 Socket들이 Server이면서 Client역할을 한다

내가 연결을 당할 수도 있고 다른 주체를 연결할 수도 있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스마트 기기여도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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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에 있는 내용을 정리(삭제)하다 어려운 말을 발견했다

분명 텍스트파일에 쓴 기억은 있는데 내가 한 말인지 다른사람이 한말을 붙여 넣기한건지 잘 모르겠다

근데 문맥이... 다른 사람이 한 말을 가져온 것 같기는 한데 내 생각도 있는건가??  같기도 하다... 

문제의 말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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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방향성이 확고하지 않다면 타인의 사소한 공격에도 쉽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역사를 한번 봐라 위대한 성취를 이루거나 자신만의 업적을 남긴 이는 당대에 힐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적이 많았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있다.

속물 근성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 아집과 독선에 빠질 위험성이 있음에도 타인의 시선에 자유로워야 함을 말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으로 더 객관적이고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판단을 올바르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왜 저런 어려운 말을 2015-04-19일날 적었을까?? 4/19혁명 관련 누가 쓴 글은 본 걸까??

멘 윗 문단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대해 흔들리지 말라는 것 같고

아랫 문단은 비판적 사고를 함에 있어 객관성을 가지라는 것 같다....

두 문단간 연관성은 떨어져 보인다 다만 윗문단에서는 자칫 독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고 아랫 문단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라는 것 같다..

괜히 건드려서 덧붙여봤자 자칫 뻔한 말이 될 수 있기도 하고 위의 말은 원본 그대로 그냥 두고자 한다 

 

다만 관련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것을 보고 남기고자 하는 말은 아래 문단과 관련있다 

바로 문제를 분석하는 방법과 비판적 사고이다 


대학생과 같이 고등교육을 받거나 또는 그런 고등교육의 지향점 혹은 세상을 바로보는 눈을 가지려면 필요한 능력으로 2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분석적 사고(통계학을 배워보는 것도 비슷하다) 능력과

하나는 비판적 사고 이다.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과 내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고

비판적 사고는 왜? 라는 질문과 답을 내리기 위해 필요하다 (차이나는 클라스 - 폴 김교수 편도 기회되면 한번 보자)

나는 이 두 가지만 제대로 배워 나와도 지성인으로 보인다 근데 생각보다 스스로 질문을 내리고 그 답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 교육?? 그런 문제가 많다고 한다..

나 역시 아무생각 없이 25까지 살았으니 조금 분하긴 하다 교육과정과 그 공부에 대해 의문이나 호기심을 가지지 못했으니...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를 푸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성인이 되어서 육하원칙을 이해하고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비판적 사고를 시작할 수 있었고 운 좋게 통계학을 배워본 것은 나름 분석할 데이터를 찾는 연습을 할 수 있던 것 같다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공부를 재개 할 수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솔직히 나이 먹으면서 기억력은 옛날보다 안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은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술이 문제일까...?)

 

꾸준히 분석하는 능력과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자...

동일한 질문을 반복하는 이유는 내 스스로 비판적 사고를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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